트로트적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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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2.jpg

트로트적인 밤

---한 상 유---

1
오가는 빗줄기로 젖었기에
허름한 선술집을 밝히는 삼십 촉 외등 아래
망설임도 잠시, 포실한
온기에 이끌였는데 뜻밖이었다
라흐마니노프라니
왼손에 기댄 그녀의 거반 빈 잔을 채우며
어렵게 말을 걸듯 서슴- 서슴-
1악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어쩔 수 없이 무너져가는 허리선과
세월 얹힌 어깨 위로 물들여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끼인
핏기 잃은 손가락들의 미동 그리고
돌아앉아 있어 아름다운 눈길과
지그시 깨물고 있지 싶은
입술의 침묵을 곁눈질하며, 삼키자
앙큼스레 손톱을 세우는 첫 잔과
뜨겁게 공복을 메우는 또 한잔과
서서히 격정으로 밀려드는 C단조의 우수

2
김이 오르는 어묵을 받쳐 들고 주인장이 돌아온다

"맛있게 드세요."
"서정적인 참이군요."
"네?..."

플루트와 클라가 그리는 선율을 따라
피아노가 거니는 악상 언저리에서 아주
못난 사랑 하나 되뇌듯

눅눅한 육각 성냥갑에서 몇 번이고
마찰음이 일더니
외등을 향한 여인의 시선 위로
연기가 오르고 나지막이
숨죽여 맺는 아다지오의 여운
흩어진다

3
절정으로 향하는 3악장에 취해
삐걱거리는 탁자에 기댄 밤
조금은 소란한 양철 하늘 아래 반짝이는
술잔과 낯선 여인의 고뇌가
황홀할 테다. 게다가

취기 사이로 끼어드는 LP판의 잡음마저
낭만적 이유가 되어
무채색 공간에서 두근거리게 하는 현의 권유를
잔에서 비우며
건의 격정에 기대어, 문득 무어라
무어라 말하고 싶었는데...

외투깃을 여민 여인이 속절없이
빗속으로 나서고
무심히 남겨진 문틈사이에서
외등은 젖어가고
일어서는 목관이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나서려다
멋쩍게 돌아서든
피아노와 관현이 다시 장조로 격앙되든 이젠
일없으니, 왜

하필 C단조의 라흐마니노프였는지
추적추적, 봄날을 가고

비-
내리는-
밤에

봄비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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